14번 의자를 발명한 미하엘 토네트
에디터 | 이솔
보파르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미하엘 토네트의 이야기는 그가 전통적인 가구 장인의 역할을 벗어나 디자이너, 엔지니어, 발명가, 생산자, 물류 전문가, 기업가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자본과 산업의 발달이 극도로 중요해진 19세기 유럽에서 우연과 운명, 인내와 노력이 결합된 성장 스토리이기도 하다. 곡목 기술에 대한 열정과 특허 획득,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박람회 참여, 대규모 생산을 가능하게 한 혁신적인 공장식 생산 시설까지. 오늘날 미하엘 토네트가 모던 체어의 지향점인 효율성, 기능성, 간결함, 대중성, 기술 혁신과 같은 가치를 표상하게 된 데에는 이 모든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사는 2호 'No.14'에 실린 인터뷰입니다.

기술 1796-1836
미하엘 토네트는 1796년 독일 보파르트 Boppard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토네트 Franz Thonet는 가죽 염색 장인이자 목수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자란 토네트는 자연스럽게 가구 제작자의 길을 걷게 된다. 1819년, 토네트는 스물셋의 나이에 아버지의 공방을 물려받고 이듬해에는 정육점 집 딸 안나 그라스 Anna Grass와 결혼한다. 후에 아들들이 합류하게 된 이 공방에서 토네트의 초기 디자인 중 하나인 보파르트 의자가 탄생했다.
1836년부터 1840년까지 생산한 보파르트 의자는 토네트의 곡목 기술 개발의 첫 번째 성과다. 당시 새로운 재료로 부상한 합판을 사용했는데, 얇게 돌려 깎은 나무 박판을 여러 겹 겹쳐 만든 합판은 가벼우면서도 강도가 뛰어나고 곡선을 구현하기에 용이했다. 토네트는 1830년부터 합판을 이용해 가구를 만드는 실험을 시작했다. 길쭉하게 자른 합판을 접착제에 넣어 끓인 후, 이를 식기 전에 금속 틀에 넣고 압력을 가해 구부리는 식이었다. 이러한 합판 휨 가공 기술을 이용해 처음에는 의자 등받이의 가로대와 세로대를 제작했으며, 곧 의자의 옆판, 안락의자의 팔걸이, 의자 다리의 지지대 등 여러 부품을 제작했다. 또한 고급 목재인 호두나무나 체리나무를 외부에 사용하고, 내부에는 보다 저렴 목재를 사용하는 등 재료 선택에도 신경을 썼다. 합판 휨 가공 기술은 재료 낭비를 줄이고 효율적인 가구 제작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19세기 유럽 도시 중산층 사이에서는 꾸밈이 적고 단순한 신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했다. 특히 이 양식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지역에서 ‘비더마이어 Biedermeier 양식’으로 전파되었다. 보파르트 의자는 이 비더마이어 스타일을 따르며, 단순한 구조와 꾸밈없는 표면, 정돈된 윤곽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휨 가공 기술이 적용됐다는 점에선 여느 비더마이어 가구와 다르다. 당시 합판은 기계화된 생산 방법의 도입으로 더욱 쉽고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휨 가공을 접목한다는 것은 합판이라는 재료가 가진 잠재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공정을 개발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토네트의 재료 연구와 기술 개발에 대한 발명가적인 관심은 가구 생산의 측면에서 목공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특허 1836-1842
19세기 유럽에서는 의자를 만들 때 원목 통나무를 선반 기계로 돌려 깎아 곡면을 구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합판에 열과 수분을 가해 곡선을 구현하는 방식은 드물었는데, 이를 토네트가 처음 사용한 건 아니었다. 벨기에에서는 1805년 장 조제프 샤퓌 Jean-Joseph Chapuis가 이 기술로 의자를 만들었고, 더 멀리 미국에서는 1808년 새뮤얼 그래그 Samuel Gragg가 이를 적용해 일래스틱 체어 Elastic Chair를 제작했다. 그럼에도 돌이켜 봤을 때 곡목 기술을 활용해 가장 많은 돈을 성공적으로 벌어들인 것은 분명 토네트로, 그 비결은 바로 특허에 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는 산업화와 기술 혁신이 가속함에 따라 새로운 소재와 이를 이용한 물건의 제조 방법에 대한 특허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특허를 선점하면 해당 분야에서 사업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용권을 판매해 이윤을 취할 수도 있었다.
당시 토네트는 보파르트 의자 외에도 다른 평범한 가구를 함께 판매하며 공방을 순조롭게 운영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한때 보파르트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회사로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토네트는 회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획기적인 한 방을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보파르트 의자를 만드는 데 사용한 휨 가공 방법에 대한 특허를 받기로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유사한 기술로 만들어진 가구가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특허를 취득하는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토네트는 프로이센 왕정에 출원한 “압력을 이용해 목가구에 형태를 부여하는 방법”에 관한 특허가 신규성 결여로 거절되자, 이에 굴하지 않고 프랑스, 영국, 러시아에 해당 기술에 대한 특허를 끈질기게 출원했다. 하지만 당시 특허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는 개인 발명가로서는 도박에 가까운 위험한 접근이었다. 각 나라마다 별도로 특허를 출원해야 했으며 출원료와 등록료, 유지료 등의 비용을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같은 특허에 대한 토네트의 집착은 회사를 거의 망하게 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토네트에게 운명과 같이 찾아온 사람이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산업과 상업을 유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수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Klemens von Metternich다. 1841년, 토네트는 고향 보파르트에서 멀지 않은 코블렌츠 Koblenz에서 열린 전시회에 의자 몇 점을 출품했는데 이 의자들이 메테르니히의 눈에 든 것이다. 메테르니히는 1842년 곡목 의자 제조 방법 특허권을 승인해 주면서 토네트에게 빈으로 이주할 것을 제안했다. 토네트로서는 그의 초청에 응하는 것밖에는 딱히 다른 수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특허를 무리하게 출원하느라 회사는 이미 빚더미에 앉아 있었고, 채권자들은 토네트 가족의 재산까지 압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토네트는 아내와 다섯 아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 빈으로의 이주를 감행하게 된다(1842). 그의 나이 마흔 여섯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족의 인정을 받아 대도시 빈으로 거처를 옮기긴 했으나, 새로운 터전에서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토네트는 오스트리아에서 “화학적, 기계적 방법을 이용해 모든 종류의 나무를 원하는 형태와 곡선으로 구부릴” 권리를 독점적으로 누릴 수 있었지만, 자본이 부족했다. 또한 빈의 목공 길드가 토네트가 자기 이름을 걸고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토네트는 꼼짝없이 당시 빈에서 성공적으로 목공방을 운영하던 클레멘스 리스트 Clemens List와 카를 라이스틀러 Carl Leistler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보다 훨씬 어린 사장 밑에서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토네트는 이들 공장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파르트 의자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디자인 1842-1850
초창기 빈에서 만든 의자들은 보파르트 의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의자의 거의 모든 요소를 곡목 합판으로 만들었던 예전과 달리, 원목을 깎아 의자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빈에 휨 가공 기술에 익숙한 견습공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토네트 의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도시의 세련된 취향을 점차 흡수해갔다. 당시 빈에는 18세기 후반의 화려함과 과시로 회귀한 ‘제2의 로코코’ 스타일과, 보다 절제되고 겸손한 디자인이 공존하고 있었다. 마치 곡목 솜씨를 뽐내듯 과장되고 날아갈 듯한 곡선으로 이루어졌던 토네트 의자는 비교적 더 간결하고 품위 있는 선으로 정돈되어 갔다.
이 시기 토네트 의자의 진화를 보여주는 것이 리히텐슈타인 의자다(1844). 클레멘스 리스트의 추천으로 리히텐슈타인 궁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에서 복잡한 쪽모이 세공 마룻바닥(parquet)을 만들었던 토네트 부자는 이와 더불어 필요할 때 쉽게 옮겨 사용할 수 있는 이동식 의자(lafsessel)를 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베니어판을 겹겹이 쌓는 대신 2~3밀리미터의 얇은 나무끈을 묶음으로 만들어 구부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리히텐슈타인 의자는 이전까지의 토네트 의자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이러한 디자인에는 당시 프로젝트의 총괄을 맡았던 영국인 건축가 피터 허버트 드빈 Peter Hubert Desvignes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에 따른다면 리히텐슈타인 의자에서 발전한 1번 의자와 3번 의자 또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3번 의자(1850)의 경우 리히텐슈타인 의자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구조적으로는 상이한데, 의자의 좌판(상부)과 다리(하부)가 나눠진 리히텐슈타인 의자와 달리 등받이와 뒷다리를 일체형으로 만들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휨 가공 기술을 적용해 의자의 구성요소를 단순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사 모델인 1번 의자(1850)는 슈바르첸부르크 궁을 위해 납품했던 의자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차이점은 뒷다리, 등받이, 모티프가 더 이상 하나의 선을 이루지 않고 독자적인 루프 모티프를 등받이에 삽입했다는 점이다. 이들 의자 간에는 다소 구조적 차이가 있으나 왕실 프로젝트로 시작한 작업이 발전해 토네트의 상업 의자 제품군을 형성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실 프로젝트는 토네트와 드빈의 역사적인 만남을 상징한다. 드빈은 토네트의 기술을 통해 가볍고 이동이 편리한 의자를 구현할 수 있었으며, 토네트는 단순하고 우아한 의자 디자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의 협업은 토네트의 초기 상업 의자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토네트와 드빈은 이후 긴밀한 친구가 되었으며, 드빈은 후원자를 자처해 토네트가 박람회에 출품한 의자를 구입한 후 자신의 컬렉션에 추가하기도 했다.

수출 1850-1856
1849년 무렵부터 빈 근교 굼펜도르프 Gumpendorf에 작업장을 열고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토네트 부자는 이 즈음 여러 박람회에서 가구를 선보였다. 1851년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시작으로 산업기술박람회가 유럽 주요 도시에서 성행했는데, 19세기 박람회는 전기, 전화, 자동차, 재봉틀, 세탁기 같은 신문물을 비롯해 당시 유럽인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각종 최신 기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별천지였다. 이러한 박람회 참가는 토네트가 더욱 적극적으로 가구 제작에 필요한 기계를 직접 개발하고 생산 시설을 공장화하는 데 커다란 동기부여가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람회는 새로운 가구의 소비층과 직접 소통할 기회를 제공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확산하는 가운데 성장한 중산층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가 된 대도시 곳곳으로 모여들고 있었고, 이들을 위한 공공장소가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토네트는 이 시기에 4번 의자(1850)를 오스트리아 무역 협회에 선보여 큰 관심을 끌었는데, 빈의 번화가인 콜마르크트 Kohlmarkt에 위치한 카페 돔 Café Daum의 소유자 안나 돔 Anna Daum은 이를 보고 자신의 카페를 위한 가구를 주문한다. 카페 돔이 토네트 의자가 처음으로 들어간 공공장소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이보다 몇 달 앞서 토네트는 페스트(현재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호텔로부터 4번 의자를 대량으로 주문받은 바 있었다. 각종 전시회와 박람회를 통해 유럽 전역의 고객층을 확보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토네트는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동메달을, 1855년 파리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러한 성과를 통해 토네트는 유럽을 넘어 남아메리카에도 수출을 확대할 수 있었다. 박람회에 출품했던 작품들은 이후 9번 의자나 5번 의자 같은 모델들로 개발되었다. 1889년 파리 박람회에 대한 일화로, 새로 지은 에펠탑 내 레스토랑에서 토네트 의자를 사용했는데, 의자 하나가 57m 아래로 떨어졌는데도 멀쩡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곡목 의자의 구조적 탄성 덕분인데, 세계인이 모인 자리에서 참으로 시의적절한 광고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박람회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가볍고 튼튼한 의자는 전 세계 호텔, 식당, 카페, 술집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 ‘커피하우스’라고 불린 빈의 카페는 토네트 의자의 가장 훌륭한 쇼룸이었다. 커피하우스는 시민 민주주의의 수도로 변모하고 있던 빈에서 작가, 예술가, 정치인 등 계급을 막론한 인사들이 자유롭게 교류하고 토론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이러한 카페를 드나들었던 사람들 중에는 아돌프 로스 Adolf Loos, 요제프 호프만 Josef Hoffmann, 오토 바그너 Otto Wagner 같은 오스트리아의 건축가들도 끼어 있었다. 토네트의 카페 의자로부터 영향받은 이들은 1900년대 곡목 가구의 흐름을 계승했다. 건축가가 만든 곡목 가구의 대표 주자로 아돌프 로스가 카페 무제움 Café Museum을 위해 디자인한 의자가 있다(1899). 로스는 “미국에 갔을 때 토네트 의자가 가장 모던한 의자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가 토네트 의자에서 영감을 받아 꾸민 카페 무제움은 장식이 거의 없는 혁명적인 디자인 때문에 “허무주의 카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토네트는 소비자의 필요를 창출하고 이를 충족시키는 자본주의 시장이 자신의 무대라는 것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일례로 그는 카탈로그를 통해 자신의 가구를 광고하고(1911년 카탈로그에는 무려 980개의 모델이 소개되었다), 1860년대 후반까지 14번 의자를 대량 구매 업체를 상대로만 도매했다. 1904년 카탈로그는 14번 의자를 “첫 번째 소비자 의자”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박람회와 카페를 통해 자신의 제품을 성공적으로 홍보하고, 혁신적인 제품 카탈로그와 효율적인 배송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토네트는 그의 의자를 전 세계로 퍼뜨릴 수 있었다.

생산 1856-1871
1852년 빈에 첫 쇼룸을 오픈한 토네트는 이듬해 회사를 공식으로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보파르트의 작은 공방에서부터 아들들과 함께 일했던 그는 회사명을 “토네트 형제들”을 뜻하는 게브뤼더 토네트Gebrüder Thonet로 정하고, 사업 명의를 아들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경영권과 막내 야콥의 대리권은 자신에게 남겨두어 중요한 사업 결정을 담당했다. 1853년 몰라르트뮐레 Mollardmühle로 이전한 작업장에는 총 42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다. 직원 구성은 아홉 명의 목수, 한 명의 선반공, 여덟 명의 베니어 절단사, 두 명의 접착제 작업자, 여덟 명의 줄질 작업자, 두 명의 목재 착색사, 열 명의 광택사, 그리고 부품 조립을 담당하는 두 명의 작업자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주문량이 급증하면서 몰라르트뮐레의 제조 시설은 곧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856년에는 현재 체코 지역인 모라비아 왕국 코리차니 Koryčany에 처음으로 규모 있는 공장을 설립했다. 첫 공장부지로 코리차니를 택한 이유는 풍부한 너도밤나무(beech)와 유럽 전역으로의 철도 시스템을 통해 운송할 수 있는 이점뿐만 아니라, 공장 노동력을 포함해 저렴한 가격에 집에서 케인 시트를 짜는 노동력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토네트는 필요한 기계를 직접 만들어 제조 공정을 단순화하고, 부품을 표준화하며 의자 구성 요소 사이의 결착을 안정화하는 데 집중한다. 모두 가구의 대량생산에 있어 필수적으로 해결해야 할 조건이었다. 또한 코리차니 공장에서는 더 이상 합판이나 나무끈 다발을 사용하지 않고 원목 그대로를 증기로 구부리는 휨 가공 공법을 사용했다. 이전 방법들은 모두 시간과 노동이 여전히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습기에 취약해 수출에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오랜 실험 끝에 나무가 쪼개지지 않게 원목을 구부리는 기술을 성공적으로 완성한 토네트는 이 기술에 대한 특허를 또한 확보했다. 기다란 목봉을 스팀 오븐에 넣어 몇 시간 동안 찌면 원하는 방향으로 구부릴 수 있을 만큼 유연해지는데, 갈라짐을 방지하기 위해 목봉 외부를 주석 판으로 감싸고, 철제 틀에 넣어 성형하는 방식이었다.
고리형 등받이가 있는 14번 의자 역시 이 방식으로 제작했다(1859). 14번 의자는 의자를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함으로써 제작에 필요한 재료와 노동력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는데, 뼈대의 모든 요소와 등나무 좌판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본질적인 것으로만 이루어졌다. 스타일적으로는 피상적 장식을 제거한 비더마이어 형식이라고 볼 수 있으나, 대량생산을 위해 제조 기법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기능과 형태의 이상적인 만남이 성사된 최초의 산업 가구 중 하나라는 것이 핵심이다. 휨 가공으로 인해 의자 다리나 등받이의 가로대와 세로대를 이을 필요가 사라진 것으로, 이는 의자에 필요한 구성 요소의 개수가 획기적으로 줄었음을 의미했다. 14번 의자는 고작 여섯 개의 부품, 열 개의 나사, 그리고 두 개의 나사받이로 이루어졌다. 토네트는 제재소에서 일련의 휨 가공 스테이션을 거쳐 조립 및 포장에 이르는 조직적인 프로세스를 공장 디자인에 도입했다. 의자 다리 지지대나 식탁 다리처럼 아주 단순한 형태의 부속을 제외하고는 모든 휨 가공 단계가 수공업으로 이루어졌다. 분업을 통해 비숙련공도 큰 어려움 없이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구를 더 싸게, 더 빨리, 더 많이 만들 수 있었다. 첫해에 1만 개의 가구를 생산한 코리차니 공장은 14번 의자가 전지구적으로 흥행하며 1860년 4만 7천 개가 넘는 가구를 생산했다. 코리차니 지역의 너도밤나무만으로는 자재 수급이 부족해진 것도, 두 번째 공장이 필요해진 것도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곧장 1860년 5월 비스트리체 Bystřice에 새 공장을 짓기 시작했으며, 헝가리 지역(현재 슬로바키아)의 벨케 우헤르체 Veľké Uherce(1865), 모라비아 할렌코프 Halenkov(1867)와 브세틴 Vsetín(1871)에도 새 공장을 지었다.
토네트가 이들 지역에 공장을 지으면서 도시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직원들이 살 집과 학교를 지었고 철길이 마을로 통하도록 했다. 마을 사람들은 대대손손 토네트 공장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온 마을이 공장을 중심으로 굴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산 시설을 확장하면서 판매 영업소 또한 세계 곳곳에 설립했는데, 1870년대 초에 이미 미국 뉴욕과 시카고를 포함해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헝가리, 스위스 등에 사무실이 있었다.


유산 1871-
14번 의자가 세상에 나온 지 꼭 십 년 후, 토네트는 자신에게 말년의 전성기를 안겨준 특허를 포기한다(1869). 곡목 가구 시장의 이인자였던 야코프 앤 요제프 콘 Jacob & Josef Kohn이 토네트의 독주를 막기 위해 게브뤼더 토네트를 상대로 특허 무효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신규성 결여”가 그 이유였다. 실제로 토네트가 삼십 년 전 합판을 구부렸을 때도, 가구 제작에 그 기술을 탁월하게 적용한 점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았던 것이지 기술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후 조임쇠를 이용해 나무를 터지지 않게 구부리는 금속 틀을 개발한 것은 획기적이었지만 모든 곡목 가구의 생산을 독점하려는 계획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토네트는 특허가 무효로 되기에 앞서 자진해서 포기하는데, 이미 회사가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어차피 만료될 특허 때문에 더 이상의 시간과 돈을 투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콘 외에도 여러 곡목 가구 후발 주자들이 토네트의 영광에 도전했으나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게브뤼더 토네트에 위협이 될 회사는 없었다.
토네트는 1871년 75세의 나이로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와 함께 일했던 다섯 아들과 손자들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회사를 무사히 운영했다. 신규 매장을 비롯해 새 공장이 폴란드 라돔스코 Radomsko, 독일 프랑켄베르크 Frankenberg(독일 공장은 현재까지 운영중이다)을 설립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유럽은 정치 경제적 상황이 매우 달라졌고, 곡목 가구의 인기도 예전만 같지 않았다. 이에 1917년 야코프 앤 요제프 콘사를 인수한 문두스 Mundus가 1924년에는 재정적 위기를 맞은 게브뤼더 토네트까지 인수했다. 문두스는 오스트리아 기업가 레오폴트 필처 Leopold Pilzer가 열여섯 개의 작은 곡목 가구 회사들을 합병해 1907년 만든 주식회사였다. 유대인이었던 레오폴드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1938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토네트 인더스트리 Thonet Industries를 설립했다. 2차대전 이후 토네트 생산 공장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다시 세워졌으나, 모라비아 지역에 있던 공장들은 냉전의 여파로 게브뤼더 토네트와의 인연이 끊어졌다. 1970년대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회사 또한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이탈리아에 본사를 둔 GTV(Gebrüder Thonet Vienna GmbH), 독일 프랑켄베르크의 Thonet GmbH, 체코 비스트리체 공장에서 기원한 Ton이 토네트의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디자인과 생산, 나아가 문화 전반에 미친 토네트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그가 나무만 구부린 게 아니라는 평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비록 토네트가 곡목 가구를 처음 만든 사람은 아니었더라도, 이로부터 대량생산에 적합한 의자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특허에 대한 선구적 투자, 박람회와 카탈로그를 통한 제품 홍보, 공장 내 노동의 분업화를 통해 일구어 낸 14번 의자의 전설은 모던 체어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기록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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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02 No.14
1859년 미하엘 토네트가 선보인 14번 의자는 우리에게 ‘카페 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이 의자는 19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카페, 레스토랑, 바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존재합니다. 미하엘 토네트는 공장식 대량생산이 가능한 곡목 및 조립 방식을 고안하고 플랫팩 포장으로 해외 유통을 실현하며, 카탈로그를 활용해 홍보하는 등 14번 의자를 통해 기술 혁신과 효율성, 대중화의 가치를 실현했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일정한 품질의 제품을 합리적 가격에 구입하고 사용할 수 있는 ‘모던 체어’의 시작점엔 클래식한 디자인과 우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14번 의자가 있습니다.


